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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파제로 주교’ 사건 : 신의 이름을 앞세운 권력 집단의 특권 수수와 종교 권위의 붕괴

독서하는 수삼이 2026. 2. 1. 22:09

2011년 필리핀 사회를 뒤흔든 이른바 ‘파제로 주교(Pajero Bishops)’ 사건은, 종교가 도덕의 수호자라는 통념이 얼마나 허약한 신화인지를 여실히 드러낸 사례였다. 이 사건은 가톨릭 고위 성직자들이 정부로부터 금전적·물질적 혜택을 받아왔다는 사실이 폭로되며 공론화되었고, 종교가 초월적 가치를 대변한다는 주장 뒤에 숨겨진 세속적 이해관계를 적나라하게 노출시켰다.

문제의 사건은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대통령 재임기(2001~2010)에 발생했으며, 그녀가 퇴임한 이후인 2011년 7월, 새 정부와 언론에 의해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필리핀 천주교 주교회의(CBCP) 소속 일부 주교들은 정부 산하 복권공사(PCSO)로부터 차량 구입 명목의 자금을 지원받아 고급 SUV를 제공받았다. 이는 ‘사목 활동’이라는 수사로 포장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종교 지도자들이 국가 권력으로부터 특권을 제공받은 명백한 사례였다.

상원 청문회에서 PCSO 신임 이사장이 폭로한 내용에 따르면, 아로요 정권 시절 수억 페소에 달하는 복권 기금이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일부 가톨릭 주교들에게 전달되었다. 민다나오 부투안 교구의 후안 데 디오스 푸에블로스 주교는 2009년 자신의 생일을 이유로 대통령에게 직접 고급 SUV 차량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고, 실제로 약 170만 페소 상당의 차량을 제공받았다. 이는 종교 지도자가 권력자에게 특혜를 요구하고 이를 당연하게 수용하는, 세속 정치 엘리트와 다를 바 없는 행태였다.

이외에도 바실란, 아브라 등 여러 교구의 주교들이 차량이나 금전 지원을 받은 정황이 드러났고, 총액은 약 690만 페소 이상으로 추산되었다. 이는 필리핀 헌법이 명시한 정교 분리 원칙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위다. 그러나 이 사건이 특별히 놀라운 이유는 법 조항 위반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종교 권력이 실제로는 국가 권력의 일부처럼 작동해 왔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아로요 정권의 부패, 선거 조작 의혹,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해 비교적 조용한 태도를 유지했다. 이후 밝혀진 차량 스캔들은, 교회의 침묵이 신앙적 중립이나 도덕적 신중함의 결과가 아니라 정치적 거래의 산물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무신론적 관점에서 볼 때, 이는 종교가 도덕적 기준의 외부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는 하나의 권력 집단임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사건이 폭로되자 주교들은 차량을 반납하겠다고 발표하며 사태 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이는 도덕적 각성이라기보다 여론 압박에 대한 대응에 가까웠다. “작은 차를 타도 괜찮다”거나 “구호 활동에 사용했다”는 해명은, 문제의 핵심이 사치의 정도가 아니라 공적 자금을 사적으로 이용하고 권력과 유착했다는 점임을 의도적으로 흐리는 발언이었다.

CBCP는 공식 사과 성명을 통해 유감을 표명했지만, 그 내용은 책임의 구체화보다는 이미지 관리에 가까웠다. ‘의도는 선했다’는 반복된 주장은, 종교 조직이 스스로를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예외적 존재로 간주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세속 사회에서라면 권력형 비리로 분류될 사안을, 종교적 언어로 희석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필리핀 언론과 시민사회가 이 사건에 분노한 이유는 명확하다. 가난과 희생을 설교하던 성직자들이 부와 특권의 상징인 고급 SUV를 타고 다녔다는 사실은, 종교 담론의 허구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파제로 주교’라는 별칭은 단순한 조롱이 아니라, 종교 권위에 대한 대중의 냉소와 불신이 언어화된 결과였다.

이 사건은 가톨릭 교회가 반대하던 인구조절법(RH법안) 논쟁에서도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었다. 정부는 더 이상 교회의 도덕적 발언을 무조건적인 윤리적 권위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교회 역시 ‘도덕적 고지’에서 사회를 훈계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파제로 주교’ 사건은 종교가 초월적 진리를 대변한다는 믿음이 얼마나 쉽게 권력과 이익 앞에서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사건에서 드러난 것은 신의 뜻이 아니라, 인간 조직으로서의 종교가 가진 욕망, 계산, 타협이었다. 종교가 스스로 주장해 온 도덕적 우월성은 이 스캔들 앞에서 설득력을 상실했으며, 남은 것은 다른 권력 집단과 다르지 않은 이해관계의 논리였다.

결국 이 사건은 종교가 사회에서 특별한 도덕적 지위를 요구하려면, 최소한 다른 세속 권력보다 더 투명하고 더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그렇지 않다면 종교는 신성한 진리의 전달자가 아니라, 신의 이름을 빌린 또 하나의 정치 행위자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